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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50년사 자료에 의하면 제1회 미스코리아 대회의 응모 자격은 만 18세 이상 28세 이하의 한국 여성으로서 지·덕·체의 3면에 진선미를 겸비한 사람, 직업의 유무는 불문하나 흥행단체 또는 접객업소에 종사한 일이 없는 미혼여성으로 제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미스코리아 감 물색을 위해 담당자는 관청과 미장원, 양장점 등 젊은 여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찾아 나섰다고 한다. 살기가 괜찮은 집안의 부모일수록 딸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아 참가자들을 모으는 데 애를 먹었다는 후문. 결국 응모 마감을 열흘이나 연기해서 대회를 치렀고, 집단 심사와 수영복 심사, 육체미를 보는 개별 심사를거쳐 미스코리아를 뽑았다.

제1회 미스코리아로 선발된 박현옥은 국제대회 헬퍼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 내외에게 인사하고 ‘미스유니버스 뷰티 패전트’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 롱비치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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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에 치러진 2회 대회는 처음부터 큰 관심과 호응 속에 이뤄졌다. 특히 결선에 오른 14명의 미인들이 꽃차를 타고 해병군악대의 인도로 한국일보사 앞을 출발해서 중앙청 앞- 세종로-국회의사당-덕수궁-남대문-서울역-남대문시장 뒤-퇴계로-대한극장에 이르는 길을 따라 퍼레이드를 벌여 서울을 축제 분위기로 물들였다

3회대회의 미스코리아로 선발된 오현주는 당시 이화여대 불문과 2학년에 재학 중 대회에 참가하여 처음부터 화제를 모았다. 그는 미스유니버스 뷰티 패전트에 참가해서 스피치상, 인기상, 스포츠상, 선외상 등 4개 부문에서 입상하며 세계적 영화제작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여 더욱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며 국내 최고의 권위와 전통을 지닌 미의 축제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TV중계의 발전과 더불어 최첨단 조명시설 및 무대장치, 그리고 당대 최고의 아나운서들의 사회로 인해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최고의 이벤트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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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스타의 등용문으로 불리며 각광을 받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전문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나 매니지먼트사가 범람하면서 더 이상 스타의 등용문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여성의 성상품화 논란 등에 휩싸이며 2002년부터 공중파에서 생중계가 중단되면서 미스코리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스코리아대회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단순히 외모가 출중한 여성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K뷰티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홍보대사이자, 소외된 이웃을 돕고 환경 보호에 앞장서는 등 사회공헌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할 대한민국 대표 여성을 뽑는 대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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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영광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60년 가까이 이어온 역사적 미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대한민국 최고의 미인을 선발할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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